[†EZE] 술과 장미.05 by 사일

  자에 앉아 탁자 위에 두 팔꿈치를 대고 손가락을 깍지낀 채로 턱을 괴고 있었다. 얼굴 표정은 전쟁에서 후퇴하는 병사의 표정마냥 불안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 불안함을 부정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그럴 리가 없어.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나를 봐주지 않으셨는데 이제와서 무슨 어처구니 없는 소리인지. 소년시절도 아니고, 사자가 다 된 배다른 형제와 싸워 살아남으라는 뜻인가? 혹은 이제와서야 장성한 아들들의 피흘리는 전쟁을 보고 싶으신 거라면 차라리…… 오히려 후자인 것이 납득이 될 정도다.'
  테제는 깍지를 풀고 오른쪽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대로 느껴지는 익숙한 녹의 맛.
  '또 코피인가? 목에 괴는군. 이젠 이것도 이골이 나.'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까지 보았던 밝은 햇빛의 잔상이 남아 눈을 감았어도 아직 붉게 여운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삽시간에 노랗게 변하기도 하고 초록색으로 변하기도 했다가 다시 붉게, 또는 어둡게 변하길 반복하였다.
  계속 눈을 감은 채, 눈을 가렸던 손등을 내려 콧등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마자 물 흐르듯이 쏟아지는 피에 입을 꾹 다물고 침을 삼켰다. 안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을 찾아 얼른 코를 감싸쥐고 풀었더니 하얀 손수건에 보기 흉할 정도로 피가 묻어나와 표정을 일그러지게 했다. 이럴 때 혹여나 재채기라도 나오면 작디 작은 핏방울들이 튀어 어딘가엔 꼭 흔적을 남기곤 했다. 물론 너무 작아서 찾아보긴 힘들었지만.
  한동안 쓸 데 없는 생각을 지우고 나니 코피가 멎었다. 늘 이런 식이었지만 최근 연회장에서 아버지가 한 말 때문에 지긋지긋한 피를 하루에 한 번은 꼭 대면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월경 하는 것보다 더 짜증나는 것 같군. 툭하면 쏟아지는 피라니.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피비린내는 맡지 않겠지. 그런 면에선 내가 더 가혹한 처사같은데……. 후,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별 걸 다 비유하고 앉아있군. 형이라면 이런 생각…… 그렇다기 보단 역시 날 없앨 계획에 칼을 갈고 있겠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테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그 장소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괴롭진 않았을 텐데.
  자신의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져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왕, 즉 아버지의 말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은 로넬을 향해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그 장소에서 빠져나와 곧장 방으로 와서 쉴 생각이었다. 누구 하나 다가와 아는 척을 할 인물도 없었거니와 사교계 자체에 자신은 결여되어 있었으니 그렇게 해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어느정도 예측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만큼 지금껏 숨죽이고 살았던 것과는 다르게 어떤 형태로든지 그림자 안에서 한걸음 나아가야 할 때가 당도하고 말았다.
  코피가 멎었을 때 타이밍도 좋게 누군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테제는 짧게 대답했고, 이름도 모르는 여시종의 안내로 문이 열렸다.
  늙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본디 태생이 그런 듯 머리카락이 은색인 남자가 들어왔다. 테제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혹은 몇 살 어린 정도로 봐서는 그리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 추정되진 않았다. 그러나 테제에게 있어 그의 외모를 보고 어떤 사람인지 추측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테제는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엄청난 선물이 도착했군."
  한마디 짧은 말이었지만 테제의 말이 끝날 무렵, 여시종이 문을 닫고 나가며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은발 남자는 머리에 눌러 썼던 후드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실은 후드를 깊이 눌러 썼다고 한들, 얼굴을 식별하지 못 할 정도로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꽤 가치가 있어보이는 로브를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백색이었다. 밑단과 소매 끝단에 금색으로 수가 놓여 있었고 어깨나 허리선에는 금사로 장식되어 있었다.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하진 않지만 이 로브를 입고 성 밖으로 나가면 일반인들의 이목을 받기엔 충분한 모습이었다.
  로브의 소매를 걷으며 남자가 대답했다.
  "비꼬는 거야?"
  "아버지의 깜짝 놀랄만한 선물은 연회장에서 했던 연설만으로도 충분해. 너까지 덤으로 받고 싶진 않아. 물론 너는 연회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겠지만."
  로브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은색 단추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달려있었다. 목 부분 부터 허벅지까지 단추가 달린 형태였다. 가운 처럼 걸쳤다가 입을 수 있는 형식이었고, 허리에 새틴으로 된 천을 둘러 묶으면 매듭 지어 길게 늘어뜨릴 수도 있었기에 옷을 입고 벗는 것 자체는 굉장히 편한 모양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남자는 단추를 몇 개 풀었다. 숨을 조이고 있던 것 같은 답답함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숨을 크게 내쉬며 테제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것 치곤 인사가 거칠군요? 테제 왕자. 그런 식으로 했다간 왕위 자리는 고스란히 로넬 저하께 넘겨야겠는걸?"
  "확실히 오랜만이다. 그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날 놀리는 것도 여전하고. 그렇지? 하이젠."
  하이젠은 눈을 휘며 웃었다. 물론 악의가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테제는 피묻은 손수건을 잘 접은 후 안주머니에 넣으며 하이젠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본 반가운 상대를 향한 악수 요청이었다. 그러자 하이젠은 그의 손을 잡는 것 보다 멋대로 와락 끌어안으며 포옹을 했다.
  "오랜만이야, 테제!"
  "윽. 하이젠, 너, 정말…… 여전하구나. 다른 나라의 왕자 같았으면 넌 벌써 징계였어."
  하이젠이 테제를 얼른 놔주며 두 손으로 테제의 어깨와 팔뚝을 잡고 얼굴을 처다보았다. 방금 전의 기쁜 얼굴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며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햇수로 5년 만에 만나는 건가? 내 생각보다 더 많이 야위었구나, 너도. 왕족 체면에 이게 다 뭐냐."
  "됐으니까, 여기까지 온 이유나 말해."
  "딱딱하긴. 5년 만에 만나는데 이런 대접이라니. 술이라도 한 잔 따라주며 반겨야 하는 거 아닌가?"
  하이젠은 테제의 어깨를 잡던 손을 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테제도 맞은편에 앉으며 하이넬의 얼굴을 빠르게 살폈다.
  그는 자신과 어릴적부터 친구였던 남자다. 하이넬의 일가는 왕족이나 귀족은 아니었지만 성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약제사라는 직업으로 독초나 생명초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었고 희귀병을 고치는 신비한 능력이 있어 귀족은 아니라 할 지라도 왕실에서 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이 나라에 살고 있지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사는 자유로운 방랑자들과 같아서 그들을 필요로 하는 순간마다 포섭하거나 섭외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기에 왕실에서 아쉬운 소릴 하며 붙잡아 둘 수 밖에 없는 일족이었다.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정세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 일족의 후손인 하이젠이 테제와 친해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 이야기였다. 왕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치료약 조차 제대로 없는 희귀병에 걸려 심한 고열에 시달리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왕이 죽을 고비를 넘길 뻔 했던 때 로넬의 어머니이자 전 왕비였던 델미아가 이 약제사 가문을 수소문 끝에 불러들인 까닭이었다. 그 당시 하이젠은 어른들을 따라 이것저것 배우며 경력을 쌓고 왕실에 얼굴을 자주 비춰 안면을 터야 했기 때문에 성의 출입이 잦은 편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연찮게 테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만났다고 하기 보다는, 성 외곽 바로 옆쪽으로 넓게 뻗은 약초밭에 약재를 가지러 갔다가 그곳에서 혼자 시간을 축내고 있는 테제를 만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아직도 하이젠의 기억에 남아있는 테제의 모습이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굉장히 어두운 얼굴 표정을 한 채 혼자라는 점이었다. 둘이 나이가 같아서일까, 아니면 어렸다는 이유 하나 때문일까. 혹은 성별이 같은 남자들이라는 이유 때문일까.
  두 사람은 그렇게 몇 번 마주치게 된 것을 계기로 많이 친해지게 되었다. 처음엔 테제의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았으나 테제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가 배다른 형제에게 언제 죽임을 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취약한 왕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에게 입에도 손에도 대서는 안 되는 약초와 약을 알려주면서 혹시라도 독살당하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 몰래 지식을 가르치고 지켜주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렇기에 둘만 있을 수 있는 폐쇄적이고 은밀한 공간이 아니면 서로 관계가 없는 사이인 척 돌아서야 했다. 아무리 옆에서 돕고 싶어도 테제의 옆에 오래 있으면 모든 것이 좋지 않았다. 로넬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의심의 여지를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주변의 시선을 분산시키고자, 결국 하이젠은 테제를 성에 홀로 남겨둔 채 떠나야만 했다. 떠날 때 조차도 자신의 일가와 함께 떠났으니 로넬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이 친구가 되리라고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긴장되는 관계 속에서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테제의 몸이 어느순간부터 약해지기 시작하여 약제사가 곁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생각하는 바였다. 다음 왕위를 놓고 두 왕자가 헐뜯는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검을 뽑아들거나 피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계획적이고 은밀하게 주도하여 상대를 쳐낼 뿐. 그렇기에 아프면 약을 먹는 것이 당연했고, 약제사를 불러 치료를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하이젠은 아주 당당하고 당연하리만치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테제의 방을 찾았다. 무려 4년 하고도 반년, 하이젠의 말대로 햇수로 5년 만에.
  "술 따를 여력이 내게 보여?"
  테제는 하이젠이 피식 하고 웃는 모습을 보며 빠르게 얼굴을 살폈다.
  왕권이 바뀌면 자신이 언제 죽을까 계산하면서 어둠 속에서만 살다 보니 느는 것은 눈칫밥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하이젠의 얼굴을 훑어보며 많은 생각들이 동시에 스쳐지나갔다.
  몇 년 전에도 하얬던 얼굴은 여전히 희었다. 방랑자들처럼 떠돌아다니며 사는데도 햇빛에 그을리거나 탄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서늘할 정도로 허연 은발 역시 여전했다. 처음 얼핏 봤을 땐 잘 먹고 잘 자란 어느 귀족 가문의 도련님처럼 곱게 보였지만 그가 입고 있는 복장이나 눈가, 손끝을 보면 고생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가슴이 아팠다.
  하이젠의 손끝은 미미한 쑥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러가지 약초와 풀들을 골라내고 약을 조제하느라 손끝이 저렇게 된 것이다. 그 손 끝에는 자연만이 갖는 특유의 약초향도 베어있으리라.
  왼쪽 약지의 손톱이 자라나는 부분은 갈라져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갈라진 곳에서 피가 났는지 진갈색으로 피가 뭉쳐져 굳어진 흔적이 보였다. 예전에 들은 것이 떠올랐다. 약재를 다루다 보면 간혹 손이 다치거나 알러지가 올라서 뻘겋게 달아오르기도 하고 손끝이 가려워서 고생하거나 가시에 찔려 아플 때가 있노라고.
  "농담이야."
  어느덧 하이젠의 얼굴에서 보이던 장난끼나 잔웃음은 가시고 진지함만이 남았다.
  보기 힘든 금안, 옅은 색 입술은 신비해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끔은 그가 남자인 것이 의심될 때가 있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아름다운 녀석은 그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많은 여성을 물리는 것이 테제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이해가 될 법도 했다. 하이젠은 그 자신만으로도 아름다운 사람이니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이 사랑한다며 고백한다 한들, 눈에 차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를 일인가보다.
  "오랜만에 왔으니 회포라도 풀어야 하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 언제 형님이 여길 들이닥칠지 모른다. 형님이 아니더라도 다른 귀족이나 기사가 올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니 여기 오래 있는건 좀 그렇겠는데."
  "무슨 소릴 하는거야? 테제, 넌 내가 오랜 벗의 정이나 풀려고 여길 온거라 생각해?"
  하이젠은 탁자 위에 놓인 찻주전자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오더니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어떤 물이 들어있나 눈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유가 있나?"
  "왕자가 몸이 약해져서 약제사가 병세를 봐주러 왔다는 것이 그렇게도 해서는 안 될 짓이란 말이냐?"
  "그런 건 아니지만 하필 이런 시기에 네가 온 건 사람들의 이목만 끌게 돼. 너희 일족은 못고치는 병이 없을 정도로 신비한 부족이라서 너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왕족인데, 하물며 왕권 계승 의지 여부를 떠나 이제껏 조용히 지내던 내가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은 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 이 시점에 네가 나에게 오는 건 자살 행위야. 너에게도, 나에게도 미친 짓이라고."
  하이젠은 테제의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도 찻잔의 표면 전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거나 쓸어보며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테제의 말이 끝날 무렵 조용히 찻잔과 찻주전자를 원래 있던 곳에 놓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폐하께서 예상 밖의 말씀을 선언하시기는 했어. 그 말 한마디로 너의 목숨이 전보다 더 위험에 처해있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돼. 로넬 저하는 폐하께 배신당한 기분이겠고, 그 분노는 네가 고스란히 안게 되겠지. 왕세자라는 칭호가 무의미하게 되었으니까."
  "……."
  "테제."
  "왜."
  "5년 전에 내가 널 떠날 때, 너를 성에 홀로 남겨둔 채 떠나길 걱정하는 나에게 네가 했던 말 기억 나?"
  "무슨 말?"
  "왕위를 포기한 것은 오래전 일이고 그렇기때문에 언제 닥쳐도 닥칠 죽음조차 두렵지 않기에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던 말."
  "그래……. 그랬지. 그런 말도 했었군. 그래서?"
  "지금은 어때? 죽음 조차도 두렵지 않다던 너는 폐하의 선언으로 인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되지 않았어? 로넬 저하가 두려워?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할 네 신세냐?"
  "그런 건 아냐. 잠시 혼란스러운 것 뿐이니까."
  "죽음도 두렵지 않다면…… 네가 왕이 되면 돼."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테제가 약간 놀라서 표정이 굳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이젠은 테제의 그 반응도 예상했는지 무표정했고 오히려 자신의 예상이 들러맞자 편해보이기까지 했다.
  하이젠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마찰되어 끌리는 소리가 나자 테제가 허겁지겁 대답했다.
  "죽기 전에 발악이라도 하라는 건가?"
  하지만 하이젠은 테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창가로 걸어가더니 커튼을 쳐서 빛을 차단했다. 아직 밝은 낮이기에 완벽히 차단할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제껴져 있던 단 하나의 커튼을 치면서 공간은 더욱 어두워졌다. 시계를 보지 않고서는 시간을 추측하기 힘들 정도이니까.
  하이젠은 천천히 테제 앞으로 걸어왔다.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껏 억눌러 온 모습으로 깊게 뱉어내기 시작했다.
  "발악? 아니, 틀렸어. 넌 왕이 될 거야. 설령 왕이 되지 못해도 죽지 않게 널 지킬거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해! 형은 지금 눈에 날이 섰어. 만에 하나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아무리 필요한 일족이라 한들, 나와 접촉했던 너부터, 너희 일족부터 죽일 거다. 그 남자는……."
  "테제. 날 실망시키지 마. 죽음도 두렵지 않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일궈 내."
  "……."
  테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입 속에서는 이를 악다물기라도 한듯 굳게 닫힌 입술은 좀처럼 열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한동안의 침묵과 고요가 있었지만 하이젠은 대답을 재촉하지도 않고 반응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모양새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에게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갈게. 그리고 찻잔의 물은 마시지 마. 되도록이면……. 찻잔은 네가 관리하는 것이 좋겠어."
  뒤돌아서 나가기 시작한 하이젠의 뒷모습을 본 테제의 얼굴 표정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조용하고 고분고분한, 그러면서도 경고하는 목소리의 다음 말이 있기 전까지는.
  끼기기긱 하면서 문이 열리고 그나마 정적을 깨워주던 하이젠이 빠져나갔다. 턱, 하고 닫히는 문의 소리와 함께 테제의 시선은 이제껏 의심의 여지 조차 없던 찻잔에 꽂혔다.
  하이젠은 나갔지만 그의 목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되풀이 되었다.
  「찻잔 안엔 소량의 약이 발라져 있으니까요, 왕자님.」
  괴로울 정도로 계속 되풀이되어 테제는 눈을 감아버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따사로운 햇살. 온통 가려진 커튼 사이로 어떻게든 파고드는 빛이 가슴 속에서 뭔가 들끓게 하고 있었다. 그것을 뭐라고 단정짓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자신 안에 변화되려 하는 고동을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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